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평릉 사변 (문단 편집) === 사마의 축출과 조상의 집권 === 조상은 한동안 사마의를 후대했으나 점차 경계심을 품고, 인척이던 [[하후현]]을 끌어들이면서 사마의와 대립하게 된다. 조상은 [[등양]]과 [[이승(조위)|이승]]의 권유에 따라 사마의의 반대를 무릅쓰고 추진했던 [[흥세 전투]]의 패배 후 [[정밀(삼국지)|정밀]]의 계책에 따라 사마의를 명예직인 태부로 높이면서 병권을 박탈해 병권을 독점하고 강력한 권력을 휘두르게 되었다. 권력을 독점한 조상은 사치와 낭비에 빠졌으며, 파당을 조직하여 측근들을 중용하고, 500여 명의 빈객을 거느렸다. 그중 조상 세력의 중심이었던 자들은 '''사창팔달'''이라고 불리었으며,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던[* 조예는 이런 걸 싫어해서 사치를 금지시키고 이를 지키지 않았던 이들을 체포해서 벌을 내렸다. 이승은 이때 친구들의 죄목을 불어서 금고형으로 풀려났다.] [[하안]], [[등양]], [[이승(조위)|이승]], [[정밀(삼국지)|정밀]], [[필궤]] 등이 조상의 측근이 되어 조정을 좌지우지했다. 하안, 등양, 정밀에게는 상서 벼슬을 내리고 필궤는 사례교위, 이승은 하남윤으로 삼아 요직과 수도 관련 직위를 측근들에게 맡겼다. 군권의 통솔에 있어서도 동생 [[조희]]를 중령군, [[조훈]]을 무위장군, [[조언(조위)|조언]]을 산기상시로 삼고 각각 어림군 3,000명을 거느려 맘대로 황궁에 드나들게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